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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1940년,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포레스트 휘테커)는 뉴욕으로 오게 된다. 탁월한 실력으로 그는 곧 유명해진다. 힘있고 아름다운 스타일로 섹스폰을 연주하는 그는 재즈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어,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금세기 최고의 뮤지션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한다. 그러나 화려한 음악 세계와는 달리 파커는 끝없는 갈등과 방황의 시기를 경험한다. 약물중독에 빠져 마약중독자가 된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실망시킨다. 이에 찰리의 아내 챈은 그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찰리도 재활을 결심하고 약물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결국 그는 인간적인 면과 음악적인 양면에서 재창조를 이루어내는데...

 

평점
7.0 (1988.01.01 개봉)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포레스트 휘태커, 다이안 베노라, 마이클 젤니커, 새뮤얼 E. 라이트, 키스 데이비드, 마이클 맥과이어, 제임스 핸디, 데이먼 휘태커, 모건 나글러, 알렌 딘 스나이더, 샘 로바즈, 페넬로페 윈더스트, 글렌 라이트, 조지 오리슨, 빌 콥스, 해밀턴 캠프, 크리스 보슬리, 조지 T. 브루스, 조이 그린, 존 위더스푼

 

 

레너드 패드가 말했다.

죽기 꼭 일주일 전에, 파커는 베이진 스트리트에 있는 길레스피에게 달려갔지요.

그는 필사적이었고 비참했으며, 애원하다시피 했습니다.

'우리 다시 합칩시다'라고 디지를 재촉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당신과 다시 연주하고 싶어요'라고 말이죠."

 

 



1. 영화 Bird.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제작을 맡은 1988 영화. 흥행은 본전치기 정도였으나(1000 달러로 제작하여 2200 달러 흥행.) 엄청 호평을 받아 칸 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 골든글로브 시상식 최우수 감독상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배급은 워너브라더스이다.

 

영화 버드는, 찰리파커의 삶에 중점적으로 둔 영화이지만, 약이 대부분의 장면을 차지하는 영화이기에, 찰리파커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보는 게 좀 더 재밌을 것 같다.

찰리파커가 누군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2. 찰리파커 당신은 누구? 

 

찰리 파커는 캔자스시티 출신이다.m본명은 찰스 파커 주니어 (Charles Parker, Jr.). 닉네임으론 Bird 라고 한다.

그래서 영화이름이 "Bird" 이다. 재즈뮤지션들 사이에서는 버드는 찰리파커라는 걸 당연히 알고, 버드라고 얘기하면서 음악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는 1920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그가 1955년 사망했을 때, 담당 의사는 그가 55세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찰리 파커는 인종을 차별하는 세상을 살아왔고, 어릴 때부터 그에 따른 굴욕감을 많이 경험했다. 어린 찰리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찰리 파커와 가까운 친척 중 음악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13세 때 그는 색소폰을 처음 접했다. 15세 때는 찰리 파커는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저녁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연주해야 했지요.

그 대가로 일당 1.25 달러 벌었어요."

 

그리고, 1937년 그의 나이 17세 때, 찰리는 전형적인 캔자스시티 스타일의 리프와 블루스를 연주하는 제이 맥샨 밴드의 멤버가 되었다.

 

찰리 파커는 심한 마약에 중독이 되었던 아티스트 중 한 명이었다. 모르핀이나 헤로인을 비롯한 마약에 절어 살던 생활 습관을 보여주며 빅밴드 리더의 신경을 꽤나 거슬렀다. 그러나 파커 자신도 빅 밴드의 획일화된 연주 방식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후에도 빅 밴드 협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후 1939년에는 뉴욕으로 옮겨서 활동했는데,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맨해튼의 한 레스토랑에서 설거지 알바를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 레스토랑에 정기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의 속주 연주(빠른 템포의 연주)를 듣고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파커의 전매특허가 되는 잦은 코드 변화와 미칠 듯이 빠른 아르페지오 속주에도 아트 테이텀의 영향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찰리 파커, 그의 인생에서 억압과 콤플렉스는 그가 뮤지션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은 택시 요금 지불을 거부하고 운전사에게 칼로 상해를 입혀 22일간 유치장 생활을 했고, 그 후 그는 시카고로 떠나 막 짐차에서 내린 듯한 더럽고 넝마 같은 모습으로 시카고에 도착했다.

또 한 번은 캔자스시티에서 파커가 카운트 베이시 밴드의 멤버들과 잼 세션을 했는데,  아무도 그의 연주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드러머 필리 조 존스는 심벌을 떼어내 멀리 내던지는 것으로 불만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가 자주 하던 말 중

" 나는 항상 패닉 상태였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아무도 내 음악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파커는 말했다.

 

" 나는 당시에 늘 쓰이던 틀에 박힌 코드 변화에 질려가고 있었고, 색다른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 그런 것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연주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나는 'Cherokee'의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고, 그때 코드의 고음부를 멜로디 라인으로 쓰고 적절한 코드 변화로 뒤를 받침으로써 종종 들을 수 있었던 바로 그것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살맛이 난다"라고 얘기를 했다.

 

그는 제이 맥샨과의 연주가 없던 시절엔 파커는 닥치는 대로 클럽에서 잼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3년 동안 정말 잠자는 시간밥 먹는 시간 빼고는 연습에 몰두했다고도 한다. 그만큼 색다르면서도 엄청 노력하는 아티스트였다.

( 잼세션때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하면서 정말 방에도 나오지 않고 3년을 연습한 후, 비밥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다.)

1940년대 초반에는 얼 하인스의 밴드에서 잠시 일하다가 밴드의 트럼펫 단원이었던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소규모 잼 세션으로 연주하면서 점점 주목받기 시작했다.

 

왼쪽 찰리파커, 오른쪽 디지길레스피

 

2차 대전 후반기였던 1944년부터 소규모로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도 어필하기 시작했는데, 춤추기 좋은 규칙적인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 일색의 스윙, 빅밴드 팬들에게는 거의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논쟁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비밥(Bebop)'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곧 이들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던 수식하는 전문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사보이 레코드사에 리더 자격으로 Ko-Ko와 Now's The Time, Billie's Bounce, Thriving on a Riff 네 곡을 만들었는데, 전자의 두 곡은 기존 유행가나 연주곡의 코드 진행이나 리프를 바탕으로 싹 갈아엎어 2차 창작한 것이었고 후자의 두 곡은 파커의 자작곡이었다. 이 녹음들은 지금도 비밥 초창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아주 적절히 보여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파커의 알토 색소폰은 모던 재즈에서 가장 표현이 풍부한 목소리가 되었다. 때로 완전하지는 않아도, 음 하나하나가 블루스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언제나 고통받는 영혼의 깊이가 느껴졌다.

 

버드 (파커)는 기본적으로 즉흥연주자였고, 탁월한 코러스 연주자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연주하는 선율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다.

 

버드는 19세의 트럼피터 마일스 데이비스를 자신의 퀸텟 멤버로 영입했다. 버드는 데이비스에게 자극제가 되었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길레스피와 파커 식의 음악으로 시작했다가 자신의 스타일 쿨재즈라는 것을 찾아내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에는 비밥에 대한 세인들의 호불호를 떠나 파커는 음악계에서는 거의 신으로 추앙받는 거물이 되었는데,

수많은 색소포니스트들이 파커의 속주와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대부분 중도 포기를 했다.

 

그리고, 1953년 5월 15일에는 토론토의 매시 홀에서 디지 길레스피,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 드러머 맥스 로치,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함께 5중 주단(퀸텟)을 꾸려 공연했다.

임시 편성한 그룹이라 이름은 없었지만 지금도 재즈 팬과 전문가들에게 'The Quintet'이라고 하면 단번에 알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전설적인 팀이다.

 

공연 뒤에도 계속 연주 활동을 벌였지만, 이미 마약 사용이 도를 훨씬 지나친 데다가 과음과 과식 습관도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딸의 사망 소식까지 접하게 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결국 1955년 초에 클럽 공연 중 연주자들을 내쫓고 무대와 클럽 내부를 완전히 부셔서 쫓겨났고, 자신의 얼마 안 되는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 마련해 준 뉴욕의 한 호텔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 쇼를 보고 있다가 급사했다.
원인은 폐렴과 내장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었는데, 부검을 담당한 의사가 그의 나이를 50~60세로 판정했을 정도로 심한 노화가 진행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고향인 캔자스시티의 링컨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찰리파커의 곡 

찰리파커의 작곡, 재즈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씩 꼭 쳐본 곡들 :) 

1. https://youtu.be/S4mRaEzwTYo

Charlie Parker- Billie's Bounce - F blues 곡 

2. https://youtu.be/02apSoxB7B4?si=p_WmIHtkQBjb0C45

Charlie Parker-Donna Lee 

Jazz standard- charil paker.

 

재즈를 조금 알고 싶다면, 찰리파커에 대해서 조금 아는 것도 좋다. 
재즈뮤지션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연습 중 하나가 재즈 옴니북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찰리파커가 쓴 곡과 솔로라인이 있는 책이다. 비밥을 공부하고 싶고, 비밥 라인을 잘하고 싶으면 그 악보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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