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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줄거리

"Born to Be Blue"는 2015년에 개봉한 캐나다의 음악 드라마 영화다.
이 영화는 실제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찰스 쳇 베이커(Charles "Chet" Baker)의 삶을 나타낸 영화고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이 영화에 출연한 이단 호크(이탄 호크)가 찰스 쳇 베이커의 역할을 맡았는데, 젊었을 때의 쳇베이커와 싱크로율이 꽤 비슷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Born to Be Blue"는 쳇 베이커의 전성기와 하락기, 그리고 재기의 과정을 다룹니다. 특히, 그의 연약한 인생과 재즈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중독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되는데, 영화는 삶의 일부분들을 다룬거여서, 쳇베이커의 내용을 좀 더 알고싶으면, 밑에 필자가 쓴 쳇 베이커의 글들을 읽어보면 좋다. 

2. 트럼펫터, 쳇 베이커의 삶

쳇 베이커는 오클라호마 주의 예일에서 태어났다. 쳇은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아직 상당히 앳되고 서투르기는 했지만, 당시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음악 쪽에서도 나름대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체스니는 아들에게 트롬본을 사주었는데, 다만 아직 쳇의 체구는 저 악기를 감당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곧 트럼펫으로 바꿔왔다.
 
하지만 쳇은 트럼펫을 그냥 독학으로만 익혔기 때문에 아직 실력은 변변찮은 수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길거리에서 놀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에 앞니 하나가 부러지는 바람에 이것도 핸디캡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트럼펫 기초 연주 과정에 등록해서 계속 음악을 익혔는데, 이론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악보 보는 법도 몰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무슨 음악이든 라디오나 음반으로 몇 번 듣고 나면 곧바로 따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은 충분했고, 당시 빅 밴드를 이끌며 미남형 외모로 영화에도 출연하며 인기를 끌던 트럼 페터 해리 제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쳇은 뭔가 많이 억눌려 있던 집안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었는지 16살에 미군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원래 보직은 행정병이었지만, 이내 무미건조한 업무에 싫증을 내고 군 빅 밴드의 트럼페터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음악 병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복잡한 편곡으로 유명했던 스탄 켄튼과 비밥의 선구자인 디지 길레스피의 연주를 단파방송으로 듣고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1948년에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은 뒤 의병 제대해야 했고, 쳇은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했다.
고교 시절에도 쳇은 학교 밴드에서 계속 연주 활동을 벌였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이론 공부나 독보 법, 화성학 등을 익히는 것에는 무관심했고, 여전히 귀로 듣고 따서 연주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1949년에 마일스 데이비스가 동부에서 노넷(9중주단)을 이끌고 녹음한 '쿨의 탄생(Birth of the Cool)을 듣고 비밥과는 다른 쿨 재즈라는 영역에 눈 뜨게 되었고,결국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학업을 포기하고 밴드에 취직하거나
이곳저곳에서 잼 세션을 하면서 계속 음악에 몰입했다.
 
쳇은 결국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집에서 나와 친구들과 셋방살이를 하며 잼 세션을 계속했다.
대학시절부터 손대기 시작한 대마초도 골초 수준으로 피워댔고, 이런저런 여성들을 만나며 바람피우는 등 이후 그의 이력에 계속 오점으로 남게 되는 방탕한 행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9년 말에 경찰의 검문에서 차에 숨겨둔 대마초가 발각되자 붙잡히고, 또한 충동적으로 저지르다시피 한 첫 결혼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고 베를린의 미국 육군 군악대에 또 자원입대를 하였다.

두 번째 입대한 군대를 제대한 52년부터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재즈계의 정상에 등극하게 되는데 비공식적으로 발매된 첫 앨범은 스탄 게츠와 그리고 공식적으로 쳇 베이커의 데뷔로 인정되는 앨범은 전설적인 비밥 재즈의 창시자인 찰리 파커의 West Coast Jazz 시리즈이다.
 
제대 후에도 쳇은 계속 이런저런 밴드와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과 잼 세션에 참가했는데, 1952년 5월 말 로스앤젤레스에 온 비밥의 대명사였던 알토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와 협연할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비록 파커의 신들린 연주력 때문에 쳇은 공기가 되었지만, 덕분에 비밥의 전설과 협연한 촉망받는 신인 트럼페터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후, 1951년에 원래 뉴욕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재즈 신인 바리톤 색소포니스트이자 작/편곡자인 제리 멀리건이 마일스 데이비스와 '쿨의 탄생' 을 녹음했던 미국 서부로 활동지를 옮겼다.
대마초와 헤로인에 너무 빠진 나머지 빈털터리가 되자 이런 막장 생활은 안되겠다 싶어서 약쟁이 생활을 청산하고자 이주해온 것이었다.
멀리건은 밴드를 만들기 위해 역량 있는 색소폰, 트럼펫, 베이스, 드럼으로 쿼텟(4중주단)을 만들려고 했다.
쳇도 자신의 친구인 베이시스트 밥 위틀락의 주선으로 멀리건을 만나러 갔지만, 첫 만남은 의외로 좋지 않아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 쳇이 파커와 협연하면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쳇 자신도 파커류의 비밥이 뿜어내는 엄청난 열기와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다시 멀리건과 접촉했다. 멀리건도 생각을 고쳐먹고 쳇을 공식 영입했고, 여기에 드러머 치코 해밀턴과 베이시스트 카슨 스미스가 더해져 피아노가 빠진 피아노 리스 쿼텟이 만들어졌다.

멀리건의 새 쿼텟은 1952년 9월 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멀리건보다 먼저 서부 재즈의 쿨 열풍을 불러일으킨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소속되어 있던 판타지 레코드에서 음반 취입 제의를 받아 첫 녹음을 제작했다. 이때 녹음된 네 곡 중 리처드 로저스의 뮤지컬 'Babes in Arms'에 삽입된 노래 My Funny Valentine이다.
 
이 앨범이 인기를 얻으면서 멀리건의 쿼텟은 브루벡에 버금가는 서부 재즈의 유명 악단이 되었고,경쟁적이고 전투적으로 격렬한 솔로를 주고받던 동부의 비밥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리즈시절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에 쿨하고 차분해 보이던 이들의 연주 활동 한편에는 여전히 대마초를 비롯한 마약이 자리하고 있었고, 쳇도 1952년 12월에 차에서 위틀락과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서 체포된 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멀리건도 약쟁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헤로인에 본능적으로 손을 대던 버릇을 그만두지 못해 연주 활동 이외의 시간에는 다시 약쟁이로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금단 현상과 원래 갖고 있던 결벽증적인 성격 때문에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해고와 영입이 반복되었고, 급기야 음악적으로는 찰떡궁합으로 보이던 쳇과의 관계도 날이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었다.
 
결국 멀리건은 '나는 편곡 작업까지 하느라 바쁜데, 쳇은 그냥 그거 받아서 연주하는 수준인데도 나보다 인기가 많다'는 식으로 열폭 했고, 쳇도 이에 맞서 '멀리건은 나를 비롯한 멤버들을 하인 취급하듯이 깔아내린다' 고 디스 했다. 설상가상으로 1953년 4월에 경찰이 쳇과 멀리건이 헤이그에서 연주하는 동안 이들의 집을 급습했고, 가택 수색에서 대마초가 발견되자 쳇 부부와 멀리건 부부를 즉시 체포하면서 언론에 구제불능 약쟁이로 소개되는 굴욕을 당했다.
 
 

 
1954년 초에는 처음으로 트럼페터가 아닌 보컬리스트로 취입한 'Chet Baker sings' 가 퍼시픽 재즈 레코드에서 출반되었는데,
다소 어눌한 오클라호마 사투리 억양과 느슨하면서 '남성적이지 못한' 앳된 목소리가 호불호를 심하게 갈라놓았다. (' 그렇지만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그렇지만 스트링 앙상블과 협연한 앨범처럼 커버에 인쇄된 쳇 자신의 얼굴 덕분에 여성들에게 상당히 많이 팔렸고, 일개 마이너 음반사에 두둑한 매상을 안겨줬다.
 
그 후 30대 중반이 된 아들이 방탕한 약쟁이가 되어 돌아오자 쳇의 부모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쳇도 개심은커녕 마약상을 만나려다가 체포되어 법정까지 가는 등등 무던히 속을 썩이고 있었다.
그 와중이었던 1966년 8월에 쳇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인채로 발견되었고, 쳇은 흑인 마약상들이 자신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집단 구타를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쳇은 그들의 신상도 제대로 몰랐고, 여러 언론에 했던 인터뷰도 별로 일관성이 없었다. 진실이야 어떻든 쳇은 이 사건으로 성한 치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강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었고, 이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연주해야 하는 금관악기 주자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결국 트럼펫마저 제대로 불지 못하게 되자, 플루 겔론을 잠시 연주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플루 겔론이라는 악기는 트럼펫과 트럼본의 중간 음역대의 악기로 늘 듣던 트럼펫보다는 어둡고 부드러운 톤을 낼 수 있다 관의 배열이 넓게 되어 있어 배음이 잘나는 악기라고 합니다 )

쳇은 약 1년 동안 주 정부에서 빈민들에게 주는 최저 복지 수당과 잡일로 번 푼돈으로 연명해야 했다.
하지만 트럼펫을 놓기는 싫었는지, 틀니를 맞추고 계속 연습을 거듭해 1967년 말에 조심스럽게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이 과정이 그로서는 트럼펫에 새롭게 몰두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 70년대 후반부터 발표된 [Once Upon a Summertime/1977] [The Touch of Your Lips/1979] [Live in Montmartre vol.2/1979] [Studio Trieste/1982] 등의 작품들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트럼펫의 음색도 음색이지만 음악적 완성도 면에 있어서도 재즈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손색이 없는 명반들이다. >
 
 
그렇게 간간이 생활하면서 음악을 하는 도중 그는 로테르담에서 예정에 없던 잼 세션을 한 뒤에도 쳇의 공연 스케줄은 여전히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당장 이틀 뒤인 12일에 네덜란드 방송국의 생중계가 예정된 중요한 공연이 있었지만, 쳇은 리허설 때도 공연 때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와중에 쳇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암스테르담의 저급 호텔인 프린스 헨드 리크의 3층 방에 투숙하고 있었다.
쳇은 12일 오후 체크인을 한 뒤 다시는 호텔 방문을 열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 세 시쯤 한 행인이 호텔 앞에서 누군가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시체의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호텔 방의 창문을 지탱하고 있던 빗장이 같이 떨어져 있던 것으로 볼 때, 투숙객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아침에 쳇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던 이들은 트럼펫을 소지하고 있던 남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시체 공시 소로우 가서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쳇으로 판명된 이 남자가 실수로 떨어져 죽은 것인지, 아니면 자살한 것인지, 또는 누군가가 고의로 떨어뜨려 살해한 것인지를 놓고 수많은 음모론이 나왔다. 하지만 타인의 침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경찰은 마약에 취한 쳇이 실수로 실족사했거나 혹은 자살한 것 같다고 브리핑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쳇 베이커의 마지막 공연은 [Chet Baker Live In Tokyo]라는 앨범으로 남겨져 있다. 이 앨범은 쳇 베이커의 알려지지 않은 기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이라 할 만큼 평생을 통해 농축된 음악성 전체가 집중된 앨범이다. 사전에 준비된 프로그램대로 연주가 진행되었는데 라이브 때마다 준비된 콘티 없이 즉석에서 레퍼토리를 결정했던 전례를 볼 때 특별한 경우로 여겨진다.
연주된 곡들은 모두 10곡 정도로(앨범에는 이중 5곡만이 수록되어 있다)
 

9곡의 연주가 모두 끝났을 때 쳇 베이커는
"오늘 연주한 곡들은 제가 일생을 통해 가장 좋아했던 곡들입니다"라는 소개를 곁들였다.
이윽고 관중들의 뜨거운 앙코르 요청에 다시 무대에 오른 그가 마지막으로 선사한 곡은 'My Funny Valentine'이었다.
장시간의 공연으로 지친 그는 마치 병약한 노인이 읊조리듯 희미한 엔딩으로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https://youtu.be/IzpfZaZfs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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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북'을 집필한 독일 비평가 요아힘 베렌트는 쳇이 비록 마일스 같은 선구자적인 면모는 없었지만,
음을 아끼면서 감성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재능은 누구도 쉽게 따라가지 못한
독자적인 것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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